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카라 전투 (문단 편집) === 양군의 전력 === 기세좋게 치고 올라가던 두 제국이 맞붙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명확하게 양측 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당대의 기록은 티무르군을 80만 내지는 120만으로, 오스만군을 40만에서 80만까지 마구마구 부풀려대고 있어 혼란은 더한다. 티무르는 이전까지 자신의 주요 원정에서 수십만 이상의 전력을 동원한 전례가 없으며[* [[토크타미시]]와의 전쟁이나 인도 원정 때 1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것이 최대였다.], 바예지트 또한 마찬가지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수치는 지나치게 과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David Nicolle이라는 학자는 티무르의 군을 14만, 바예지트의 군을 8만 5천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Ilhan Niaz는 티무르군을 10만, 오스만군을 8만 5천으로 추정하고 있다. 티무르군은 시리아 원정에서 얻은 막대한 부를 활용해 전력을 최대한 증강시켰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튀르크계 공국들의 전력을 끌어모아 티무르의 지휘 경력상 최대 규모의 군대를 편성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주력은 투르크-몽골 계열의 경기병이었으며, 인도 원정에서 획득한 다수의 전투 [[코끼리]] 또한 편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보병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티무르군의 좌익 지휘는 티무르의 막내 아들이자 후에 [[티무르 제국]] 3대 군주로써 명군이라 추양받는 샤 로흐, 티무르의 손자로 2대 군주에 올랐다가 샤 로흐에게 찬탈당하는 할릴 술탄이 맡았고 우익 지휘는 티무르의 아들이자 할릴 술탄의 아버지인 미란 샤[* 낙마 사고 이후 제정신이 아니어서 후계 구도에서 밀렸다. 근데 군을 지휘할 때는 멀쩡했다고 한다.]가 맡았다. 전위는 티무르의 손자인 아부 바크르가, 친위대는 티무르의 외손자인 술탄 후세인,[* 티무르 사후 왕위를 노렸다가 할릴 술탄에게 발리고 샤 로흐에게 목이 따였다.] 중앙군은 피르 무하메드[* 티무르의 맏이 자항가르의 아들. 카불에 분봉받고, 티무르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지만 할릴 술탄에게 처발리고 고립되어 암살당한다.]가 맡았다. 물론 최고 지휘관은 [[티무르]] 자신이었다. 어느정도 병과와 군제가 정돈된 티무르군과는 달리 [[바예지트 1세]]의 오스만 군대는 여러 군대가 혼재한 혼성군에 가까웠다. 술탄 자신은 1천여의 예니체리들의 호위를 받았고[* 예니체리가 5만여에 달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딱히 근거가 없다. 먼 후대에 막장테크를 타기 전까지 예니체리의 수는 오스만군 전체의 10% 안팎을 차지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수십년 뒤에 예니체리의 규모가 많이 팽창한 뒤에도 총 규모는 1만선이었다.] 군의 주력은 [[시파히]]들이었으나 튀르크계 공국들이 파견한 병사들도 다수 있었다. 또한 발칸 반도의 유럽 봉신들도 다수 참전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세르비아 공작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지휘하는 기병 5천에서 1만 명 가량이 주력이라 할 만 했다. 오스만군의 우익은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좌익은 바예지트 1세의 아들 쉴레이만이 맡았다. 이쪽도 최고 지휘관은 물론 바예지트 1세 본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